파키스탄, 그 땅에서 휠체어를 타는 사람들 (비마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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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작성일12-10-16 15:19 조회11,96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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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그 땅에서 휠체어를 타는 사람들




“파키스탄 장애인은 집에 방치되어 집에서 살다 집에서 죽는다.” 2012.10.06 03:13 입력
![]() ▲파키스탄에서 온 스물두 살 청년 노레일. 자신이 활동하고 있는 파키스탄 NGO 마일스톤(MILESTONE) 티를 입고 있다. |
“안녕하세요. 나는 노레일입니다. 나는 파키스탄에서 왔어요~”
불볕더위와 국지성 호우가 번갈아 가며 날씨를 어지럽힐 무렵, 장애인운동 현장에 수동휠체어를 탄 ‘낯선 외국인’이 종종 보였다. 그는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 사무실에, 국제 보조공학 심포지엄에, 탈시설장애인과 함께하는 도시체험 '이음여행'에, ‘하조대 희망들’ 건립을 막는 양양군청 항의 방문에 쑥쑥 나타났다.
그는 사교성이 꽤 좋은 듯 보였다. 전동휠체어를 탄 장애인의 뒷손잡이를 붙잡고 지나가는 모습은 개구져 보였고, 이동하는 휠체어에 앉아 쿠키를 아그작, 아그작 달달하게 먹는 모습은 태평해 보였다. 인사동을 지나가다 어느 외국인과 반갑게 인사 나누기에 아는 사람이냐고 물으니 얼마 전 대학로 한 식당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라고 했다.
그는 지난 8월 파키스탄에서 왔다. 만 스물두 살, 이름은 노래일 압바스(Naureel Abbas). 사람들은 그를 '노레일'이라고 불렀다. 작년 10월 파키스탄에 온 한국·아시아태평양장애포럼(APDF) 소개로 올해 장애청년국제인턴십에 참여하게 됐다.
파키스탄 하면 구체적인 정보보다 빈곤과 혼란의 이미지로 떠오른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파키스탄 소식은 대체로 음울했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접경 부근에서 소형 버스의 폭탄 테러로 민간인 사망, 반미 시위로 민간인 사망, 카라치 의류 공장 화재로 300여 명의 사상자 발생 등.
이런저런 뉴스를 뒤져보다 ‘파키스탄 장애인’이란 검색어를 입력해보았다. 이 혼란스러운 나라에서 장애인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하나의 사진이 떴다. 파키스탄 라왈핀디에서 택시에 매달려가고 있는 파키스탄 장애인의 모습이었다. 사진 속 장애인은 바퀴 세 개 달린 낡고 녹슨 납작한 수레에 작은 몸을 얹힌 채 기우뚱기우뚱 매우 위험하고 아슬아슬하게 도로를 주행하고 있었다. 이 사진 한 장 외에 ‘파키스탄 장애인’에 대한 정보는 접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현상이 ‘당연한’ 걸까? 한 나라의 뉴스를 접할 때, 가장 먼저 접하게 되는 것은 그 나라의 정치적 상황, 또는 경제적 지표들이다. 그러한 뉴스 속에서 사람들의 삶은 사건의 단서로만 조명된다. 그러나 시대를, 사건을 선명하고 생생하게 비춰주는 것은 그 안의 사람들의 목소리 아닐까. 특히 억압받는 이들의 삶은 더더욱 그럴 것이다. 숫자로 환원된 경제적 지표는 섬세한 삶을 묘사해내지 못한다.
‘파키스탄 장애인’에 대해 인터넷으로 그 어떤 정보도 접하기 어렵다는 것, 이 사실은 하나의 현실을 방증한다. 그들의 삶 자체가 사회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 아니, 드러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는 것. 아니, 그러한 기회의 대상에서조차 일찍이 배제된 존재라는 것.
“파키스탄의 대부분 장애인은 집에 방치되어 집에서 살다 집에서 죽는다.”
노레일이 말하는 파키스탄 장애인의 삶이다. 노레일의 목소리를 통해 파키스탄 장애인의 삶을 들어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돋보기가 되어 파키스탄 장애 민중의 삶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바다에 물 한 방울 떨어지듯
노레일은 두 살 반이었던 때, 소아마비(폴리오 바이러스)에 걸렸고 하반신을 쓰지 못하게 됐다.
![]() ▲노레일 만 한 살 생일 때 모습. "폴리오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전, 걸어 다닐 수 있을 때의 모습"이라고 노레일은 설명했다. ⓒNaureel Abbas |
노레일은 당시 다리 치료를 위해 골반 앞쪽을 수술했으나 아무런 호전이 없었다. 그는 “그 수술을 지금도 왜 했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그는 6개월 동안 병원에 있게 되고, 건강은 오히려 더 나빠졌다.
“약을 많이 먹고 화장실에도 잘 가지 못하니 배가 많이 아팠어요. 화장실이 제일 문제였죠. 병원 화장실은 좁기도 좁고 턱이 있으니 들어갈 수가 없었어요. 간호인이 있기는 하나 화장실은 사적인 부분이니, 부모가 있을 때만 갈 수 있었죠.”
노레일은 “의사들은 환자의 질병에 대해 현실적으로 가르쳐 주는 것도 없고 환자들을 돈줄로만 생각한다”라며 “남아시아 7개국(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네팔, 부탄, 몰디브)에서 모두 같은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다”라고 꼬집었다. 노레일은 “결국 장애인이 있는 가족들은 치료에 돈을 쏟아 붓고, 장애인은 돈도 벌 수 없으니 결국 그 가족들은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1994년, 노레일은 학교에 입학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통학버스를 타고 다녔다. 왕복 네 시간 정도 걸렸다. 버스는 계단버스였지만 노레일은 클러치(장애인 보행 보조기구)를 이용해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세, 네 대의 통학버스가 지역마다 돌았다. 그러나 노레일은 병원 치료 때문에 학교에 잘 다니지 못했다.
노레일이 다녔던 학교는 장애인을 위해 지어진 학교로, 정부와 국제기관, 기업, 복지관 등으로부터 받은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사립학교였다. 노레일은 “학교 후원자들을 위한 잦은 행사로 수업이 잘 이뤄지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3층 건물에는 학교, 병원, 재활센터 등이 같이 있었다. 그 학교에는 노레일과 같은 소아마비를 비롯해 뇌성마비, 근육장애, 저신장 장애 등의 장애인들이 함께 다녔다. 장애인을 위한 학교였지만 근처에 사는 비장애인도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정원은 150여 명 정도로 장애인 10명 중의 한 명꼴로 비장애인 학생이 있었다.
“장애인이 된 뒤에 늘 기어 다녀서 옷도, 몸도 항상 까맣게 더러워진 상태였어요. 사람들은 그런 나를 늘 쳐다봤고, 그렇게 바닥에서 생활하는 게 나는 굉장히 창피했죠. 그래도 부모님은 나를 공원이나 공공시설에 많이 데리고 다니셨어요. 학교에는 휠체어가 있었지만 몸의 크기와 맞지 않아 사용하기 어려웠어요. 학교 선생님들과 직원들은 내게 ‘넌 왜 기어 다니니?’라고 하며 의자에만 가만히 앉아있게 했어요. 그러나 어린 시절, 나는 밖에 나가 뛰어놀고 싶었죠. 2층에서 생활했는데 장애인 학교였지만 건물에 경사로는 하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그 경사로마저 너무 가팔라서 위험했죠. 그 중 화장실에 대한 접근성은 아주 심각했어요. 장애인을 위한 학교였으나 장애인에 대한 생각도, 교육도 없는 형편없는 곳이었죠. 장애인에 대해 파키스탄 거의 모든 학교의 선생과 직원들은 그런 태도를 보입니다. 그 시절은 내게 너무 안 좋은 시간이었어요.”
![]() ▲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맨 오른쪽 두 번째 줄, 하얀 티에 안경 쓰고 있는 사람이 노레일이다. 당시엔 클러치를 이용해 학교에 다녔다. ⓒNaureel Abbas |
파키스탄의 초등교육은 정부 지원을 받아 무상으로 이뤄지지만 아이들 대부분은 학교에 가지 않는다. 의무교육 기간은 따로 없다. 노레일은 이에 대해 “생활비도 없는 상황에서 부모들은 돈을 벌기 위해 아이들을 학교가 아닌 일터로 보낸다. 아이들은 페인트칠, 호텔 하녀 등의 일을 하며 돈을 번다. 파키스탄엔 어린이 노동조합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생존 앞에서 글자를 배운다는 것은 사치일까. 이러한 환경에서 ‘장애인’이 학교에 다닌다는 것에 대해 노레일은 다음과 같은 비유를 써서 표현했다.
“장애인이 학교 다니며 교육받는다는 것은 바다에 물 한 방울 떨어지는 것과 같은, 그렇게 적은 확률입니다.”
대학 나온 장애인이라는 존재의 희귀성
노레일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나라로 치면 전문대라고 할 수 있는) 11, 12학년 교육까지 마친 뒤 4년제 대학에 진학했다. 손으로 운전할 수 있는 오토바이가 있어서 대학교 때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 그러나 문제는 학교에 도착한 이후였다. 학교 건물은 오래되어 엘리베이터도, 심지어 경사로도 없었다. 노레일은 대학 총장과 이사회를 찾아갔다.
“학교 담당자에게 제안해 총장과 이사회 앞에서 학교 내 장애인 이동권, 접근성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프레젠테이션 기회를 잡게 됐어요. 학교에 다니는 4년 동안 학교 안에는 새로운 건물들이 하나, 둘 올라갔습니다. 현재 모든 건물은 아니지만 절반 정도는 경사로와 엘리베이터가 설치됐고 지금도 여전히 설치해가는 중이죠. 현재는 졸업했지만 학교에 장애인 이동권과 관련된 의견을 주고 있어요. 이로써 UCP(University of Central Punjab)는 당시 남아시아 최초로 장애인 접근성을 갖춘 학교가 되었죠.”
![]() ▲시설에 사는 장애인과 탈시설해 생활하고 있는 장애인이 만나 장애인 자립생활에 관해 이야기하는 '이음여행' 도시체험에 참여한 노레일의 모습. 인사동을 둘러보고 있다. |
생존을 위한 노동 때문에 배움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사회에서 대학을 나온다는 것은 비장애인에게도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노레일의 가족 중에서도 대학 나온 이는 노레일이 유일했다. 비장애인도 교육받기 어려운 파키스탄에서 대학 나온 장애인이라는 존재의 특수성은 그 자체로 흔치 않은 특별함이었다. 그에겐 수차례 ‘좋은 기회’들이 다가왔다.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차별 없이 고용하자는 주제의 세미나에서 발표한 적이 있었죠. 그 일을 계기로 5성 호텔을 비롯해 총 네 군데에서 일자리 스카우트 제의가 왔어요. 그러나 가지 않았죠. 만약 그 호텔에서 일했다면 호텔 내 장애인 접근권을 위해 일했을 거예요. 그게 가장 큰 문제죠. 호텔 내 장애인 접근권에 대해서만 일한다는 것, 이것은 전체 장애인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나는 전체 장애인들을 위해 일하고 싶었죠. 그 호텔에서는 비장애인과 차별 없이 평등하게 고용한다고 하지만, 결국 그 호텔에서만 역할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러나 NGO 단체에서 일하면 여러 기관을 위해, 더 좋은 효과를 만들 수 있겠죠.”
장애인, 신으로부터 저주받은 사람들
그런 그가 택한 곳은 파키스탄 NGO 단체 마일스톤(MILESTONE)이었다. 현재 그는 마일스톤의 매니저로 활동하고 있다.
마일스톤은 1993년 봄에 만들어졌다. 당시 파키스탄에는 컴퓨터, 스포츠 사업 등을 하는 장애인 시설이 있었다. 그 시설은 후원자들의 기부금으로 운영되었으나 시설 측은 그 돈을 장애인의 삶이 아닌, 자신들의 이익을 불리기 위해 썼다. 이에 대해 장애인들은 저항하며 시설에서 나와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일스톤이 탄생했다. 마일스톤은 현재 장애인의 자립생활, 무장애 사회, 교육, 의식 높이기, 역량 강화, 기본 시설의 제공 및 정규화 등에 중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 마일스톤은 성별, 신념, 사회·경제적 지위와 관계없이 장애인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디딤돌 역할을 수행한다.
“파키스탄 전체 인구의 10%인 1,800만 명가량이 장애인으로, 그 중 3%가 중증장애인으로 파악되고 있다. 1,800만 명 중 극소수만 장애인 센터나 학교에 다닐 수 있다. 많은 수의 장애인들이 구걸하고 살며, 대부분은 집에 방치된 채 살다가 집에서 죽는다. 파키스탄 사람들은 장애인을 거지, 신으로부터 저주받은 사람, 지적장애인은 귀신에게 빙의 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부분 장애인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그런데 마일스톤은 장애인의 권리를 추구한다. 이러한 방향이 옳다고 생각해 마일스톤에서 일하게 됐다.”
마일스톤에서 노레일은 장애인 보조기구, 정부 정책과 법 제정, 자립생활 훈련, 농성 등을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현재 파키스탄에서 진행되는 운동 중 한 가지는 한국의 기초생활보장수급비와 같은 장애수당을 달라는 요구이다. 그리고 지역마다 교육권 보장, 재활시설 설치 요구 등 작은 운동들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장애인 이동권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현실에서 이들의 목소리를 한데 모으기는 쉽지 않다. 노레일은 파키스탄 장애인의 삶을 가로막는 가장 큰 어려움으로 ‘장애인 이동권’을 꼽았다.
“버스, 택시 등 이동수단을 포함해 정부기관, 복지관, 빌딩 등 그 어느 곳에도 장애인 접근성이 갖춰져 있지 않다. 이게 가장 힘들다. 그래서 마일스톤 등과 같은 단체의 네트워크를 통해 서로 연락해 장애인 이동권, 접근권 보장을 요구하는 시위를 한다. 그러나 장애인들은 정작 휠체어가 없으니 모이지를 못한다. 거리 접근성도 없고…. 다른 도시나 먼 곳에서 오지 못하니 시위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부분 소규모 사람들이 모여 농성을 한다. 그럴 때면 복지관 등에서 대표들이 나와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고 말은 하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 ▲노레일은 “파키스탄의 대부분 장애인은 집에 방치되어 집에서 살다 집에서 죽는다.”라며 파키스탄 장애인의 현실을 전했다. |
십여 년 전, 한국의 중증장애인들은 지하철 철로와 버스를 점거했다. 그로 말미암아 땅 밑 지하철이 서고, 도로 위 버스가 섰다. 그들은 사다리를 칼처럼 목에 쓴 채, 자신의 몸에 쇠사슬을 묶었다. 지나가던 시민은 장애인들에게 “왜 선량한 시민을 볼모로 잡느냐”라며 목소리 높여 따져 물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대부분 지하철 역사에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됐고, 저상버스와 장애인콜택시가 도입됐다. 당시 중증장애인들이 요구한 것은 단 하나, '장애인 이동권 보장'이었다. 물론 현재도 저상버스와 장애인콜택시는 법에 정한 도입대수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한 활동가는 “장애인의 삶이 나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비장애인의 삶에 비하면 예전에는 마이너스 100이었던 것이 현재는 마이너스 80정도”라고 지적한다. 여전히 80이 부족하다.
파키스탄은 십여 년 전 한국의 상황보다 훨씬 열악하다. 중증장애인들이 싸우려고 해도 정작 부딪혀 싸우려는 그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투쟁 자체가 힘들다. 이동권은 모든 권리 투쟁의 선결 조건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를 위한 방법의 하나로 현재 마일스톤에서는 직접 맞춤형 휠체어를 제작해 보급하고 있다.
“정부와 민간 시설에서 휠체어와 클러치 등을 제공하는데 정부에서 서류 심사하는 데만 한 달이 걸린다. 또한 정부에서 주는 휠체어는 신체 크기에 맞지 않아 거의 사용을 못 한다. 민간에서는 후원금을 받아 사람들 몸에 맞게 맞춤 제작해주지만, 그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개인 휠체어를 가진 장애인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마일스톤은 휠체어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15만여 개의 휠체어를 맞춤 제작해 파키스탄 전국에 뿌렸다. 파키스탄에는 전동휠체어 공장은 없고 애프터서비스센터만 있는데, 마일스톤이 다른 나라로부터 중고 전동휠체어를 받아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그곳에서 애프터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모든’ 장애인들은 드러나야 한다
“나는 어렸을 적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아 대학을 나오고 지금 일도 할 수 있게 됐다. 일해서 번 돈으로 나에 대해 관리도 할 수 있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서도 계획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파키스탄의 그 어떤 장애인도 나 같은 삶을 살 수 없다. ‘거의 모든’이 아닌, ‘모든 장애인’들이 말이다.”
노레일은 ‘거의 모든’이 아닌 ‘모든 장애인’이라고 강조해 말하며 "파키스탄에는 장애인을 위한 게 아무것도 없다"라고 밝혔다.
파키스탄에서는 장애인 대부분이 가족과 함께 산다. 아니, 집에서 방치된다. 부모가 없는 장애인은 보육원에 보내지고 지적장애인과 뇌병변장애인은 정신병동에 보내진다. 정부의 지원은 전혀 없다. 모든 빈곤은 가족, 개인의 몫이다. 국가는 빈곤을 책임지지 않는다. 파키스탄 전체 인구의 60%가량이 하루 1달러(1100원 정도)도 채 되지 않는 돈으로 살아간다. 그러한 사회에서 장애인은 극한의 빈곤선, 그 바깥을 기어 다니는 사람이다. 노레일은 이러한 장애인들이 사회에 ‘드러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 ▲지난 9월 18일 장애인 숙박시설 ‘하조대 희망들’ 건립을 반대하는 강원도 양양군청 점거에 함께하고 있는 노레일의 모습. 노레일, 통역사, 전장연 박경석 상임공동대표.(왼쪽부터) |
“장애인에게 있어 시위와 농성은 굉장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장애인은 대부분 집에 방치되어 있기 때문에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모른다. 그러나 장애인이 농성하면 TV와 신문에 나온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장애인이 어떻게 살아가고 어떤 어려움에 부닥쳐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한국은 파키스탄과 굉장히 다르다. 중증장애인들이 시위 현장에 나서야 설득력이 생기는데 파키스탄에서는 중증장애인들이 (이동권 때문에) 시위에 잘 나서지 못한다. 한국에서 중증장애인들이 시위와 농성에 참여하는 모습이 특히 인상 깊었다."
'신으로부터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굴레를 쓰고 살아가는 사람들. 집에서 태어나 집 문턱만을 바라보다 집에서 스러지는 사람들. 파키스탄 장애인의 삶이 그러하다. 그럼에도 노레일은 하나의 꿈을 가지고 있다.
“전 세계 장애인들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싶다. 이를 통해 전 세계 모든 장애인이 차별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이뤄가고 싶다.”
마냥 개구장이 같고 천연덕스러워 보이는 스물둘 파키스탄 청년 노레일. 노레일은 11월 초에 다시 파키스탄으로 떠난다. 파키스탄으로 가서 그는 이곳 한국에서 배운 것들을 아낌없이 펼쳐 보일 것이다. 자신들의 권리를 쟁취해내기 위해 어떻게 싸워야 할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지, 그는 자신의 동료와 함께 고민하며 싸워나갈 것이다. ‘역사의 중요한 사건’을 뜻하는 마일스톤(Milestone)이란 단어의 의미처럼 이들의 활동은 파키스탄 사회에 어떠한 균열을 낼지 사뭇 궁금해진다.
노레일의 휠체어 바퀴가 부지런히 한국을 돌고, 지구를 가로질러 파키스탄에 무사히 가닿기를, 그리하여 파키스탄에서의 그의 힘찬 활동소식을 한국에서 전해 들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가장 밑바닥에서, 그러나 그만큼 뿌리 깊게 싸워나갈 이의 삶을 지지하는 마음으로.
![]() ▲현재 파키스탄의 NGO 마일스톤에서 활동하고 있는 노레일. |
![]() ▲대학 졸업식 졸업 사진. 맨 앞 가운데에 졸업가운을 입은 노레일의 모습이 보인다. ⓒNaureel Abbas |
![]() ▲마일스톤 동료들과 함께.장(첫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노레일) ⓒNaureel Abbas |
![]() ▲올해 추석,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 농성장에서 사람들과 함께 추석을 보내며 신께 기도드리는 모습. 오른쪽은 전장연 박경석 상임공동대표. ⓒNaureel Abbas |